내시 김처선 – 연산군에게 죽어가면서 까지 바른 말을 하다

내시 김처선 – 연산군에게 죽어가면서 까지 바른 말을 하다



내시 김처선

내시 김처선 그는 누구인가?

내시 김처선 관련해 포스팅해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여러 임금 중 폭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연산군인데요.

연산군이 아무리 흉악무도한 짓을 하더라도 성리학에 사로잡혀 있던 그 잘난 양반, 사대부들은 혹여나 자신의 안위에 문제가 생길까,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어느누구도 충언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숙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평소 사대부들이 우습게 보았던 내시가 자신의 목숨은 생각하지 않고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직언을 올렸습니다.
그 내시가 바로 김처선 인데요.

김처선의 충언과 죽음

김처선은 세종대왕때부터 왕을 모시기 시작해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무려 일곱명의 왕을 섬겼습니다.

내시 중에서는 가장 높았던 판내시부사 겸 상선을 역임한 조선의 환관이 김처선이었습니다.

그는 세종대왕 때에 내시가 되어 궁에 들어왔고, 문종 때 처음으로 유배도 갔다가 복직하였으며, 이후에도 몇 차례 유배를 가거나 삭탈관직 당하는 등의 부침을 겪으며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랬던 김처선은 성종 대에 대비를 치료하는데 공을 세워 정2품 자헌대부에 오르며 인생역전 하게됩니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6명의 왕을 모셨던 김처선은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7번째 왕인 연산군이 즉위한 후 김처선은 연산군의 시종이 되어 그를 모시게 됩니다.

왕이 된 연산군은 얼마지나지 않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켰고, 사냥과 사치를 즐겼습니다. 조모인 인수대비를 구타하여 죽게하였고, 채홍사와 채청사 등을 파견해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하였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산군에게 어느 누구도 바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1505년 연산군이 음란한 춤인 처용희를 추며 방탕한 놀이를 즐기고 있었는데요.

이때 이 모습을 본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직언을 올립니다.

“이 나이 많은 신이 네 임금을 섬겨왔으나 고금을 돌이켜도 이토록 음란한 왕도 없었사옵니다.” 라고 연산군에게 말한 것 입니다.

내시 김처선 3

김처선의 이 같은 마을 들은 연산군은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매우 화를 내며 연산군은 직접 활을 들고 김처선을 겨냥해 활을 쏘았습니다.

이 화살을 맞고 쓰러진 김처선.

하지만 자신에게 감히 이런 말을 한 김처선에게 분이 풀리지 않았던 연산군은 쓰러진 김처선의 다리를 잘라버렸습니다. 다음으로 혀까지 잘라버리는데요.

이렇게 칼을 휘두르면서 연산군은 김처선에게 “내게 용서를 빌면 살려 주겠다” 라고 했지만 김처선은 끝까지 용서를 빌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연산군의 잘못을 직언하다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폭정을 일삼았던 연산군에게 어느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던 행동을 내시 김처선이 한 것입니다.

연산군의 옹졸한 복수

연산군은 죽어가면서까지 끝까지 자신에게 용서를 빌지 않고 충언을 올렸던 김처선에 대해 분노가 풀리지 않았으며, 그를 증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김처선이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그와 관련된 것들에 복수를 했습니다.

김처선의 양아들인 이공신을 처형했으며, 7촌 까지의 친족들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또한 김처선의 이름중 하나인 ‘처’ 라는 글자의 사용을 금했습니다. 그로인해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처용무의 이름도 풍등무로 바꿉니다.

거기에 더해 김처선의 부모 묘까지 헐어버렸으며, 그의 집은 밀어보리고 연못을 만들어버립니다.

어찌보면 유치하고 치졸하기까지 했던 연산군이었는데요.

김처선이 얼마나 싫었으면 전국에 있는 김처선이란 동명이인들의 이름을 개명하게 했고, 과거 합격자중 권벌이라는 사람이 과거 시험에서 처(處)자를 썼다고 ‘합격을 취소하는 사례’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목숨을 걸고 충언을 올린 충신에게 가한 연산군의 옹졸한 복수.

이런 충신의 충언을 가볍게 무시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대로 폭정을 계속 일삼던 연산군은 결국 중종반정으로 왕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없지만, 그래도 연산군이 김처선이 충언을 올릴때라도 그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더라면 중종반정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조선의 역사 또한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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