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최초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외국인 최초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외국인 최초

외국인 최초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외국인 최초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립묘지 겸 호국보훈시설인 현충원. 현충원에는 나라를 위해 순직 및 전사한 분들을 안장하는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현충원에 안장될 경우 애국지사묘역에 안장이 되는데요.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이 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입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우리나라를 자신의 조국처럼 사랑하였으며, 한국인을 동포와 같이 사랑했고, 제암리 학살 사건의 참상을 보도했던 인물입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한국식 이름은 그가 직접 지은 석호필입니다.

이번에는 파란 눈을 갖고 있던 독립운동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그는 누구인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Warwickshire) 주 럭비(Rugby)시에서 태어난 영국계 캐나다인 이었습니다.

1916년 봄. 한국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장 애비슨 박사로 부터 일제강점기의 한국으로 와 달라는 권유 서신을 받고 그해 가을 운명과도 같은 한국에 아내와 첫 발을 딛게 됩니다. 한국에 온 스코필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담당했습니다.

초기에 의사 소통이 힘들었던 그는 영어를 하는 한국인으로 부터 한국말을 배웠고 이후에는 한국말로 강의할 만큼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습니다. 1917년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했으며 앞서 소개드렸던 석호필이라는 그의 이름도 만들게 됩니다.

그의 성인 ‘石’은 굳은 종교적 의지를,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이름에 까지 사용한 것입니다.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1919년 3월 1일 우리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거사가 일어나기 직전 3.1운동에 대해 통보 받고 협력을 요청 받았던 유일한 외국인이 스코필드였습니다.

3.1 운동 거사 하루 전인 2월 28일.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이갑성 이라는 사람이 그를 찾아와 독립선언문을 보여주며 3월 1일에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고 그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스코필드에게 독립선언문의 사본을 영어로 번역하여 최대한 빨리 미국 백악관에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데요.

또한 3월 1일 오전에도 다시 스코필드를 찾아와 오후에 파고다공원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가 있을 것인데 오후 2시까지 와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에 스코필드는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고 만세시위현장의 사진을 찍어 3.1운동의 실상을 증거 사진과 함께 해외에 알립니다.

그는 일제의 비인도적 한국인 탄압에 맞서 일본인 고관들을 찾아가 항의하고, 언론에 투고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데 앞장 섰습니다.

일본군이 제암리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한 제암리 학살사건. 이 현장에도 직접 찾아가 현장을 촬영하고 기록하여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그날의 참혹함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스코필드가 이렇게 활발하게 독립운동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일동맹으로 인해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를 일본에서 간섭할 수 없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스코필드가 당연히 일제에게는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결국 스코필드는 일제에 의해 캐나다로 강제 출국을 당하고 맙니다.

강제 출국 이후에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격려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일제에게 만행을 중지할 것을 호소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을 우리나라도 알기에 스코필드를 34번째 민족대표라 부르기도 하는 것 입니다.

다시 한국으로…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고 1958년 대한민국 정부가 광복 13주 기념일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 식전에 국빈으로 스코필드를 초빙합니다. 이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스코필드는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서 일하기를 자원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글을 쓰거나 교육 장려 활동을 하며 지냈으며 우리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하였습니다. 1968년 스코필드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받았습니다.

“내가 사망하면 한국 땅에 묻어주고 돌봐오던 소년소녀 가장들을 보살펴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0년 4월 16일, 대한민국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파란 눈의 영국계 캐나다인이었지만 누구보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갈망했던 석호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그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업적을 기려 외국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멀고도 만 낯선 타국에서 일면식도 없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데 노력했던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를 잊지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영화 암살 전지현의 모티브가 된 실제 항일 무장 투쟁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

👉내 아들아.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한국의 잔다르크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