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영 선생 – 1조 땅을 포기하고 600억 재산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이석영 선생 – 1조 땅을 포기하고 600억 재산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이석영 선생

이석영 선생 그는 누구인가?

이석영 선생 관련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살면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편안하고 풍족한 삶 대신 어렵고 힘든 삶을 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고 결국은 굶주림으로 생을 마감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영석 이석영 선생이십니다.

이석영 선생 1

명문가의 자재에 부까지

이석영 선생은 삼한갑족 명문가의 자재로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이유승의 여섯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선생은 당숙 뻘 되는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양부인 이유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었으며, 막대한 부도 소유하고 있었는데요.

얼마나 부자였는고 하니 서울에서는 3대 부자요, 경기도에서는 5대 부자에 속했으며 조선 팔도에서는 10대 부자안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력가였습니다. 이런 양부에게서 선생은 엄청난 재산을 물려 받습니다.

원래 태어난 이석영 선생의 집안도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엄청난 집안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다른 형제들도 돈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석영 선생이 6형제 중 가장 돈이 많았습니다.


당시 선생의 재산은 만석이 넘었고, ‘양주에서 서울로 올 때 남의 땅을 밟을 필요가 없을 만큼’의 어머어마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경기도 양주시에서 동대문까지 오는데 모든 땅이 선생의 땅이었고 명동성당부터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까지의 금싸라기 땅 6천평도 선생의 땅이었습니다.

이석영 선생 3

고단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선택하다

1910년 어느 가을에 선생의 여섯 형제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선생의 형 건영을 비롯해서 철영, 회영, 시영, 호영 네 아우가 모인것 입니다.

이 자리에서 넷째 우당 이회영 선생이 일제의 노예로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느니 형제 모두가 가족들을 대리고 서간도로 가서 독립 운동의 거점을 만들자고 말합니다.

이에 형제들은 두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바로 그 의견에 동의했고 망명 준비를 시작합니다.

이때 이석영 선생의 나이는 벌써 쉰여섯살로 환갑이 얼마남지 않는 나이였습니다.

선생과 형제들은 재산을 급히 처분했고, 그렇게 하다보니 제 값을 다 받지도 못하며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막대한 재산을 처분하게 된다면 일제의 감시망에 걸릴 위험이 있어서 형제들은 명동과 을지로이 있던 현재 시가로 따지면 1조원에 달하는 땅의 매각마저 포기합니다.

이렇게 재산을 처분해 이석영 선생은 40만원이라는 자금을 마련합니다.

당시 쌀 1석이 3원정도 였으니 그때의 40만원은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변환하면 60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그것도 급처분 하여 제 값도 못 받고, 매각도 포기한 재산도 있었는데 말이죠.

그대로 우리나라에 남아있었으면 만석의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며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었고 대대손손 막대한 부와 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지만,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선생과 형제들은 1910년 12월 지금의 남만주인 서간도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형제들은 이제 고단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택한것 입니다.

이석영 선생 5

신흥 무관학교

형제들은 이제 고단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택한것 입니다.

그들은 남만주 유하현 횡도천과 삼원부 추가가에 터를 잡았으며, 이석영 선생의 자금력을 동원해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합니다.

이후 신흥 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열었는데, 이 자금 역시 이석영 선생에게서 나왔습니다.

선생은 신흥 무관학교에 전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고, 그 결과 1920년 8월에 신흥 무관학교가 폐교 될 때 까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략 3500 명의 독립군을 배출합니다.

이렇게 배출된 이들이 청산리 대첩 등에서 일제에 승리하면서 큰 공을 세웁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낌없이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다보니 600억에 해당하는 40만원이라는 돈이 망명 3~4년 만에 10만원으로 줄어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이후 선생이 있던 서간도 지방에 가뭄과 서리 같은 자연재해까지 발생해 농사까지 망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돈까지 모두 사용하고 선생은 서간도로 옮겨온지 얼마 못가 빈곤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또한 1920년에 있었던 경신참변으로 일본군이 만주 일대의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 대학살을 피해 선생은 10여년간 머물렀던 정든 땅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석영 선생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다

이후 이석영 선생은 중국에 연고도 없이 혼자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습니다.
또한 수중에 돈이 없어 비지를 얻어 경우 끼니를 연명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1934년 이석영 선생은 굶주림에 지쳐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겨우 장례는 치뤘지만 중국인 공동묘지에 버려지듯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삼한갑족 명문가의 자재이자 한때는 만석 재산가였던 선생의 최후로는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한말 이석영 선생과 비견될 만큼의 부를 누리고 있었던 명문가 자재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이완용이나 송병준 역시 거부였지만 이들은 매국과 친일을 일삼으며 자신과 그들 가문의 안위와 부귀만을 생각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석영 선생은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이들과는 반대되는 고단한 길을 택해 걸으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사용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한 선생이야 말로 진정한 사회 고위층 인사들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일을 한 선생을 우리나라는 광복 후 무려 46년이 지난 1991년에서야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습니다.

젊지 않은 나이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단하고 어려운 길을 스스로 걸으며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석영 선생의 이름 석자를 후대를 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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