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60전 60승 불패 신화의 장군 – 상승장군 편곤 마스터 정기룡 장군

임진왜란 60전 60승 불패 신화의 장군 – 상승장군 편곤 마스터 정기룡 장군



정기룡 0

임진왜란 60전 60승 불패 신화의 장군 정기룡 장군

임진왜란 60전 60승 불패 신화의 장군 정기룡 장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임진왜란의 명장을 손꼽아 보라고 한다면 이순신 장군이나 김시민 장군, 권율 장군 같은 사람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주인공인 정기룡 장군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임진왜란 바다에서 왜군을 박살낸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쓰신 이순신 장군님이 계셨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장군이 60전 60승의 무패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실록에도 80여 곳에 정기룡 장군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고, 왜적의 기록을 봐도 정기룡 장군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왜적이 보는 앞에서 왜적의 배를 갈라 생간을 씹어먹으며 그대로 돌격해 7일 동안개 왜군부대 9천에 가까운 군사를 고작 7백으로 휩쓸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상주성 탈환 전투 뿐 아니라 거창, 금산, 고령, 성주, 합천, 의령, 경주 일대에서도 정기룡 장군이 활약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정기룡 그는 누구인가?

정기룡 장군의 본명은 무수이며, 본관은 진주, 곤양 정씨의 시조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경남 하동의 어느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3세 어린 시절에 시묘살이(부모님이 돌아가 시 면 3년간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산소를 돌보며 공양을 드리는 일)를 할 정도로 효심도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1586녀 무과를 보기위해 한양으로 올라간 정무수는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런 정기룡에게 임금 선조는 기룡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에 있었으며 1591년 훈련원 봉사가 됩니다.

임진왜란 구국의 영웅

1592년 정기룡 장군이 31세가 되던 해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개전 첫해인 1592년에 조선의 국토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는데요.
조총으로 무장한 10만이 넘는 왜군 앞에 조선군은 변변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패주에 패주를 거듭하고 있었고, 수많은 백성들은 왜군에게 도륙당했습니다.

부산 앞바다에 왜군이 상륙한지 두달여 만에 조선 14대 임금 선조는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평양성으로 파천했다가 또다시 의주까지 도망칩니다.

1592년 정기룡 장군은 상관인 경상우 방어사 조경을 따라 돌격장이 되어 종군하였습니다. 4월 23일 무렵 조경은 거창에서 왜장 구로다의 좌군과 전투를 벌입니다. 이 때 부장이었던 정기룡이 기병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선두에 서서 맹공을 가해 구로다의 좌군 선봉대 500명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웁니다.

이후 조경과 양사준이 경상우도 지역의 관군을 이끌고 금산에서 방어전을 펼치다가 왜군의 반격을 받게됩니다. 당시 왜군은 경상 우병사 조경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고 그로인해 조경은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 순간 정기룡 장군이 단기필마로 적진에 뛰어들어 무기를 편곤을 휘두르며 적병들을 무수히 박살내고 포로가 되어있던 상관 조경을 구출합니다.

당시의 활약상이 삼국지 조운이 홀로 아두를 구한 것을 연상시켜 임진왜란의 ‘조자룡’이란 별명을 얻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기룡이라는 이름 석자가 조정에 알려졌으며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정기룡의 무용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정기룡이 상관인 조경을 구출한 것은 『난중잡록』뿐만 아니라『선조실록』에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장수였는지 조선에 파병된 명의 장수들 역시 대체로 정기룡을 용장으로 평가했다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명나라 제독 마귀는 이순신, 권율, 한명련과 더불어 정기룡을 조선의 4대 양장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이후 정기룡은 곤양 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지방 진출을 막아냈으며, 유병별장을 거쳐 상주 판관으로 임명됩니다.

상주성을 탈환하다

1592년 11월의 어느 밤.

경상감영이 있는 상주성 외곽에 갑작스레 거센 횃불의 물결이 일렁이며 상주판관 정기룡이 이끄는 수백여 명의 관군과 백성들이 상주성 탈환을 위해 급습합니다. 당시 정기룡은 화공전을 선택했고, 왜군이 조총으로 조준 사격을 할 수 없는 야밤을 틈타 성 안의 적군을 향해 불화살을 파부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불화살 공격에 왜군은 당황하였고, 횃불이 없는 유일한 문인 동문에만 적군이 없다고 생각해 그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는 정기룡 장군이 만든 함정으로 동문에 매복해있던 정기룡 장군의 부대에 의해 수많은 적군이 도륙당했으며, 마침내 상주성까지 탙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같은 정기룡 장군의 연전연승 소식은 거듭된 패전으로 수심만 가득했던 조정과 백성들에게 한 가닥 희망의 불씨가 되어주었습니다.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해전에서 연승을 거두며 조선의 바다를 지켜낸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이순신과 함께 정기룡은 구국의 영웅으로 급부상 하기 시작합니다.

‘바다에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이 있다’는 말도 이때 생긴 말입니다.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592년 임진왜란 발발 1년동안 일어난 일이며, 당시 정기룡 장군의 나이는 불과 31세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승전

이후에도 정기룡 장군은 진주 목사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 부근에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주둔하여 왜군을 견제함으로써 진주대첩에도 다소 기여한 부분도 있었으며

1593년 그동안의 전공으로 회령 부사에 승진하게 됩니다.

같은 해에 왜적에게 왕자를 내준 반역자 김수량 등 16인을 효수하였으며, 1594년에는 정 3품 상주목사가 되었다 이후 다시 통정대부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영의정 유성룡은 선조에게 “경상도 전체에 백성들의 인적이 드문데 정기룡이 버티고 있는 상주성에는 10만의 인구가 모여 살고 있다”며 정기룡 장군을 칭찬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 대장이 되어 고령에서 8월 7일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고령읍 내곡리에서 벌어졌던 둔적 교전에서 왜장 다히라가 이끄는 왜군1천여 명의 병력을 거의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립니다.

이후 용담천대첩에서는 현재의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용담 천변에서 대치하고 있던 왜군을 유인해서 격전을 벌여 대승을합니다. 당시 용담천에 주둔하고 있었던 왜장 시마즈의 군사는 2만 명에 이르렀지만 정기룡이 이끄는 4천여 조선 관군에 대패해 살아 돌아간 왜군은 고작 5백에 불과했다 합니다.

고령지역에서의 두 차례 승전은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그로인해 왜장 가토가 이끄는 부대는 함창, 상주에서 남하하여 10월 3일 울산으로 철수했고 모리와 구로다가 이끄는 일본군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598년에는 명나라 군대의 총병직을 대행하여 경상도 방면에 있던 왜군의 잔적을 소탕, 용양위부호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다시 경상 우병사가 되었으며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경상도 방어사로 되어 다시 침입해올지 모르는 왜군에 대비했습니다.

1610년(광해군 2)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 뒤 보국숭록대부로서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직을 맡다가 1622년 통영 진중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사후 정기룡 장군

정기룡 장군은 사후 상주의 충렬사에 제향 되고 시호는 충의이며 장군의 묘는 상주군에 있습니다.

1605년 전쟁이 끝나고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선무 원종공신 1등에 책록이 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선무 1등 공신, 정기룡 장군은 선무 원종공신 1등으로 얼핏보면 비슷한 공신에 책록이 된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선무공신 1등은 이순신, 권율, 원균 단3명 뿐이고, 선무 원종공신1등에는 조헌, 고경명 부산포에서 전사한 정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영남 등 565명 정도가 있습니다. 선무공신은 1~3등급을 다 더해도 18명 밖에 되지 않지만 선무 원종공신은 총 9060명에 이를 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정기룡 장군이 선무공신이 아닌 선무원종공신에 이름을 올렸다하여 그의 공이 모자라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나이에 화려한 전적을 가진 정기룡 장군을 정치적으로 견제했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로 그의 업적은 뛰어났던 것입니다.

선무공신에 왜 있는지 모를 원균을 빼고, 그 자리에 정기룡 장군이 들어갔더라면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도 들게하는 부분입니다.

정기룡 장군 사후 151년이 흐른 후인 1773년에 영조가 그에게 ‘충위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해유충무 육유충의(海有忠武 陸有忠毅)
‘바다에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이 있다’

조총을 앞세운 왜군에게 힘없이 쓰러져갔던 조선의 군대와 왜군의 호각소리만 들어도 꽁무니 감추기 급급했던 여타의 장수들과는 달랐던 정기룡 장군.

임진왜란 내내 치른 크고 작은 60차례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던 그의 전공은 독보적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왜군에 의해 유린당했던 조선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정기룡 장군은 구국의 영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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