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운 장군 – 홍건적을 물리쳤지만 간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다

정세운 장군 – 홍건적을 물리쳤지만 간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다



정세운 장군

정세운 장군 – 고려말의 명장

정세운 장군 관련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말 홍건적을 물리치며 큰 공을 세웠지만 간신의 모략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왕의 명령이라는 말을 듣고는 충의 하나만으로 자신의 죽음까지 받아들인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고려말의 명장 정세운 장군입니다.

정세운 장군 1
정세운 장군

정세운 그는 누구인가?

원 간섭기에 세자였던 공민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를 할때 그를 따라 들어가 호위하였으며, 공민왕이 왕으로 즉위하자 호종을 했던 공으로 1등 공신이 됩니다.

이때 간신 김용과 더불어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고려 공녀 출신 원나라 황후였던 기황후. 그런 기황후를 믿고 그의 오라비 기철은 다른 부원배들과 함께 갖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려의 왕 공민왕까지도 무시하며 그들은 권력을 농단했는데요.

이에 공민왕은 정세운 장군에게 기철 일당을 주살하라 명합니다.

1359년 정세운 장군은 그들을 처단하고 그 공을 인정받아 다시한번 더 1등 공신에 책록됩니다.

정세운 장군 2
홍건적

홍건적의 난

고려말은 각종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받던 시기였습니다.

1359년 음력 12월. 압록강이 얼어붙자 모거경이 4만의 홍건적을 이끌고 강을 건너 의주, 정주, 인주, 철주의 4주를 함락시키고 서경을 점령합니다.

1360년 음력 1월 고려군은 2만명의 병력으로 홍건적에게 점령당한 서경을 탈환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투로 홍건적은 서경을 버리고 북쪽의 용강과 함종 방면으로 퇴각하는데요. 이때 사망한 홍건적의 수가 수천명은 되었다 합니다.

고려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북쪽으로 도망가는 홍건적을 추격하여 공격합니다.

그 결과 넘어올때 4만의 숫자였던 홍건적의 숫자가 다시 강을 건너 도망갈때는 3백여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홍건적을 물리친 고려. 그러나 다시 한번 홍건적으로 인해 고려는 전란에 휩싸입니다.

1361년 음력 10월.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려 퇴로가 차단당한 홍건적들이 또다시 고려를 침공해옵니다.

반성, 사류, 관선생, 주원수, 파두반 이라는 홍건적의 수괴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고려를 2차로 침공해온 것인데요.

그 군세가 1차의 4만보다 몇배나 많은 20만의 대군이었습니다.

이 당시 정세운 장군은 서북면군용체찰사에 임명되어 절령의 성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홍건적의 대군에 의해 음력 11월 11일에 절령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마는데요.

이 소식을 접한 공민왕과 고려의 조정은 홍건적을 피해 남쪽의 복주(현재의 경상북도 안동)로 파천하게 됩니다.

이때도 정세운 장군은 공민왕을 호종하는데요.

공민왕이 경기도 이천에 도착하던 날 고려의 수도 개경이 홍건적들에 의해 함락됩니다.

홍건적을 물리치다

이 소식을 듣고 정세운 장군은 밤낮으로 울분을 참지 못하며, 홍건적을 자신의 손으로 소탕할 것이라 스스로 맹세했습니다.

그는 왕을 찾아가 적을 섬멸할 수 있게 해달라 주청하였고, 공민왕은 이를 수락했습니다.

정세운 장군이 총병관에 임명되었고, 왕은 그에게 절월을 주며 모든 군사를 총지휘하게 합니다.

이때 홍건적들은 더이상 고려의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개경을 본거지로 삼아 주변 각지역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1362년 정월. 정세운 장군은 안우, 이방실, 황상, 한방신, 이여경, 김득배, 안우경, 이구수, 최영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군사 20여만 명을 거느리고 홍건적을 물리치기 위해 출진합니다.

정세운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개경을 포위하며 홍건적을 공격했습니다.

고려군의 파상공세에 전의를 상실한 홍건적은 개경을 버리고 그대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지역으로 후퇴합니다.

고려군은 퇴로를 열어준 채 홍건적을 끊임없이 공격하였고, 그해 여름에 홍건적 수장 중 한명인 파두반을 사로잡는 전과까지 올립니다.

또 다른 홍건적의 수괴였던 사류와 관선생은 이성계 장군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은 끝이 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고려 역시 막대한 타격을 입어 국운이 쇠퇴하게 됩니다.

홍건적을 피해 안동까지 내려갔던 공민왕은 1362년 11월 24일 마침내 수도 개경으로 재 입성합니다.

홍건적의 난에서 정세운 장군은 그들을 물리치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비참한 최후

하지만 이때 한국사 최고의 간신이라 해도 무방한 김용 이라는 작자가 흉계를 꾸밉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김용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때 정세운 장군과 함께 왕을 모신 사람으로, 공민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였습니다.

정세운 장군이 자신을 넘어서는 큰 공을 세우자 라이벌을 제거하기 위해 김용은 공민왕의 문서를 위조합니다.

이 위조 문서로 정세운 장군의 부관이었던 안우, 이방실, 김득배 장군에게 정세운 장군이 역모를 꾸몄으니 참살하라고 명령합니다.

왕명을 받든 그들은 상관이었던 정세운 장군을 죽이려했습니다.

최후의 순간 정세운 장군은 왕의 명이라는 말을 듣고, 왕에 대한 충의로써 죽음까지 받아들입니다.

이에 고려 말 명장 정세운 장군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김용

자신의 간계가 들통날 것이 겁이 났던 김용은 이후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에게는 상관을 죽였다는 구실로 그들까지 처형합니다.

정세운 장군을 비롯한 역전의 용사들은 홍건적은 막아냈지만, 간신 김용에 의해 너무나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모두를 다 죽이고도 이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웠던 김용. 그는 다시 기황후와 내통하였고,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울것을 계획합니다.

흥왕사의 난

어느날 공민왕이 흥왕사에 머무르지 이것을 기회로 김용은 난을 일으켰고, 흥왕사의 난으로 인해 문하시중 홍언박을 비롯한 수많은 관리가 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은 자신과 얼굴이 닮았던 환관 안도치가 대신해 죽임을 당해 겨우 살아날 수 있었고, 공민왕을 암살하려던 김용의 음모는 결국 실패합니다.

김용은 이번에도 자신이 빠져나가기 위해 수를 쓰는데요.

난을 일으킨 것이 자신이지만 오히려 자신이 직접 난을 진압한 척하며, 공을 세운것 처럼 위장하면서 이 위기를 벗어나려 했습니다.

하지만 체포된 자들을 김용이 고문하지 않자, 점점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됩니다.

이에 임견미가 반란군을 국문하자 반란군의 수괴가 김용이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김용은 자신은 시중 홍언박 등을 제거하려 했을 뿐이며, 역심은 없었다 변명합니다. 이에 임견미는 역심이 없었는데 왜 공민왕과 닮은 내시 안도치를 죽였느냐 라고 반문했는데요.

이에 할말이 없었던 김용. 충신들을 음모로 죽이고 공민왕까지 시해하려했던 희대의 간신은 역모죄로 극형에 처해져 사지를 찣기는 형을 받고 최후를 맞이합니다.

왕의 명령이라는 말에 자신의 목숨조차 기꺼이 바친 충신 정세운 장군.

고려말 나라와 백성을 위해 홍건적을 물리치고 간신에 의해 억울한 최후를 맞이한 정세운 장군을 한번쯤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것으로 정세운 장군과 관련된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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