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잔다르크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

한국의 잔다르크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



한국의 잔다르크

한국의 잔다르크 정정화 선생

한국의 잔다르크 라고 김구 선생이 불렀던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도맡았으며, 목숨을 걸고 독립자금을 조달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것을 바쳤던 그녀. 하지만 해방 이후 부역죄로 고소되는 아픔까지 겪었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이번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의 잔다르크 1
정정화 선생

양반집 규수로 태어나 상하이로

1900년 8월 서울의 ‘양대 판서 집’으로 불리던 대갓집 2남 4녀중 셋째 딸로 태어난 정정화 선생.

아버지는 딸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정화 선생은 오빠의 어깨너머로 공부를 배웠고, 총명하여 천자문, 소학 등을 익혔습니다.

이후 그녀는 자라서 명문가인 안동 김씨 김가진의 맏아들인 김의한과 혼인합니다. 혼인 이후 신학문에도 관심을 갖고 배우게 되는데요.

정정화 선생의 시아버지 김가진은 대한협회 회장과 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19년 3·1만세시위 직후 대동단 총재를 맡기도 했습니다.

이후 독립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시아버지 김가진은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는데요.

1920년 먼저 망명한 남편과 시아버지를 찾아 정정화 선생은 친정아버지에게 8백원을 받아 홀로 상하이로 건너갑니다.

이 당시 1원은 지금의 화폐 가치로 3~6만원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다시말해 액수가 2400만원 ~4800만원 정도 되었습니다.

한국의 잔다르크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다

상하이로 망명한 그녀는 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책임지게 됩니다. 정정화 선생은 부지런하고 알뜰했습니다.

중국 생활 27년 동안 자신의 가족을 돌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임시 정부의 주요 인사 및 그들의 가족까지 다 선생이 돌보고 보살폈습니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1930년까지 10여년 동안 6차례나 국내에 밀파되어 독립자금을 조달했습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이 대립과 분열을 하였고, 그로인해 임시정부의 위상이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그로인해 국내외 동포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요.

1925년 3월 이승만대통령을 탄핵 사면하고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 정부인 국무령제로 바꾸었고, 1926년 말 김구 선생이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집단지도체제 형태인 국무위원제로 헌법을 다시 개정해 겨우겨우 임시정부의 명목을 이어갔습니다.

이때 당시 김구 선생은 여기저기 다니다 배가 고프면 정정화 선생을 찾아와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줄라우?” 했다고 합니다.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은 후 상하이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격을 피해야했습니다. 그래서 8년간 무려 5000km 가 넘는 대장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 안살림을 맡고 있던 정정화 선생은 흔들리는 임시정부를 지켜냈습니다. 이런 그녀를 보고 김구 선생은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칭송했다고 합니다.

1935년에 임시정부의 한국국민당에 가입해 공식적인 독립 단체 활동을 시작하였고, 1940년에는 충칭의 한국독립당 광복군 창립에 남편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여 간사를 맡아 활동했고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위한 3·1유치원에서 교사도 하는 등 항일민족독립운동에 열정을 다해 헌신했습니다.

이후 1943년에는 이념을 넘어서 각 정파의 여성들과 을 합쳐 대한 애국 부인회를 재건하는 데도 앞장섰던 그녀였습니다.

위문 금품을 걷어 최일선의 독립군에게 보내기도 했으며, 방송을 통해 국내외 여성들의 각성과 협력을 촉구하기까지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대한민국이 독립을 하게 되었고, 광복을 만주에서 맞이한 선생은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귀국을 돕고 뒷처리를 다 한 이후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끝까지 임시정부를 위해 최선을 다한 그녀였습니다.

선생에게 닥친 시련

이렇게 모든것을 바쳐 대한민국의 독립에 최선을 다했던 선생이지만 해방이후 공을 인정 받기는 커녕 부역죄로 고소되는 일을 겪습니다.

6.25 한국전쟁 당시 남폄은 납북되고, 자신은 서울에 남아있었다는 것이 그녀가 고초를 겪었던 이유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1982년 정정화 선생에게 늦었지만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하셨던 선생은 납북되었던 남편을 끝내 보지 못하고 1991년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임시정부가 가장 힘들었을때 안살림을 맡았고, 임시정부의 중요 요원들을 책임졌던 한국의 잔다르크였던 정정화 선생을 한번쯤은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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